논문 : 파강(巴江) 김두남(金斗南)과 『양금신보』

2011 
본고에서는 『양금신보』를 간행한 파강(巴江) 김두남(金斗南, 1559~1647)에 관한 자료들을 가능한 폭 넓게 수집하여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그의 생애와 교유관계를 정리하는 한편, 그가 남긴 『양금신보』를 다시 살펴보면서 거문고보 발행인으로서의 역할과 소통에 대해 살펴보았다. 김두남은 여러 관직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올랐고, 사후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된 인물로, 젊은 나이부터 사장(詞場)에 나가 일대의 이름난 이들과 교유하였으며, 성예(聲譽)가 높았다. 임실 현감 시절에는 이웃 남원에 있는 양덕수를 임실로 데려와 『태평유보』(太平遺譜)를 만들도록 권유하였는데, 당시 임실현의 재력이 달려서 옛 악보에 있는 모든 음악을 다 수록할 수가 없었기에 양덕수 악사의 의견을 반영하여 옛 악보에 있는 곡 중 느린 곡 위주로 7~8곡만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태평유보』를 바탕으로 목판본 『양금신보』가 간행되었다. 『양금신보』의 첫머리는 금아부(琴雅部)·현금향부(玄琴雅部) 순으로 실려 있는데, 이러한 체제는 김두남이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음악적 지식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양금신보』 서(序)에 유장경(劉長卿)의 이란 시를 인용한 점, 유몽인이 김두남과 상음(賞音, 혹은 知音)으로 교유한 사이라고 언급한 점 그리고 선조 21년(1588, 戊子) 한양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시위에서 명문가의 자제 30여 명과 함께 대표로 을 불렀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그였기에 임진왜란 후 거문고 음악 전승의 앞날을 우려하여 양덕수 악사에게 『태평유보』를 만들도록 권유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양금신보』를 간행할 수 있었다. 김두남은 『양금신보』를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여러 음악 애호가들과 소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양금신보』가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양덕수는 유명 인사가 되었으나 발행인 김두남의 이름은 거문고 음악 애호가들에게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이것은 ``임실현감 김두남 서(任實縣監 金斗南 序)``가 기록된 『양금신보』의 마지막 장이 인쇄와 전사과정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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