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중반 동북아 국제정세와 조선의 나선정벌

2018 
러시아의 동양진출은 17세기 흑룡강 유역을 중심으로 청나라와 러시아,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통일전쟁에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였던 청나라는 모든 병력을 남방의 전선에 투입하였다. 청나라는 가장 안전한 배후지역 으로 인식하였던 동북방에 새로운 러시아세력의 진출에 대해 처음 사소한 지역의 무력충돌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중앙정부는 패전소식을 인지했지만, 현 실적으로 남방의 병력을 옮겨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북방의 가용한 병력을 투입하여 대응했다. 또한, 청나라는 첫 전투에서 패전한 이유를 화력의 부재라고 분석하고 가장 근접한 위치에서 조총부대를 보유한 조선에 파병을 강요했다. 청나라의 파병부대 요구를 받은 조선은 당시 국왕이었던 효종의 즉위과정에서 발생한 왜정자문사건을 무마하고, 조선과 청나라의 국제관계를 원활하게 진행시 키기 위해 청나라의 파병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효종은 파병 가능한 병력을 고려하고, 파병부대의 안전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최정예 부대를 차출하여 파병했 다. 조선의 정치, 외교, 군사적 목적에 부합하여 파병부대는 큰 승리를 거두고 안 전하게 귀국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러시아군의 국경침입에 대응하여 청나라는 지방군대를 강화하 면서 한편으로 조선에 2차 전투부대의 파병을 요구했다. 청나라는 남쪽 전선에서 저항세력에 대한 정벌전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부대를 동북 방으로 옮겨 투입할 수 없었다.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파병요구를 받고 1차 파병부 대의 승리경험을 바탕으로 2차 파병부대를 구성하고 출병시켰다. 조선의 2차 파 병부대는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청나라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조선의 나선정벌은 17세기 중반 동북아 국제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아 실시되었 으며, 향후 국제질서에 영향을 주었다. 청나라는 부족한 병력으로 중국에 진입하 여 반항세력을 제압하였으며, 투항한 군대에 대한 통제 및 반란세력의 진압을 위 해 주요 병력을 중요 지점에 배치했다. 청나라는 러시아군의 침입을 계기로 동북 방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지고 군사통치제도를 정비했으며, 남쪽의 해군세력을 동 북방에 배치하기도 했다. 조선은 나선정벌을 통해 미묘한 갈등관계였던 청나라와 의 관계를 원활한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은 어느 정도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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