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정주지역의 3.1운동

2018 
이 논문은 평안북도 정주지역의 3.1운동을 살펴본 것이다. 필자가 정주지역의 사례를 살펴본 이유는 해당 연구와 관련하여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일제시대 수형자료 등이 지금까지 활용된 바가 없었고, 한편으로 정주는 시위 횟수는 비교적 많지 않지만 평안북도에서 가장 치열한 시위가 발생한 곳으로 연구의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역적 특색에 비춰 보았을 때, 정주지역 3.1운동은 러일전쟁과 경의선 철도부설에 따른 지역민의 피해, 의병운동 · 국채보상운동 · 애국계몽운동으로 대표되는 국권회복운동, 조선시대 이래 확산되어 오던 기독교와 천도교, 파리강화회의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의주지역의 3.1운동은 3월 2일 발생하여 4월 5일까지 지속되었다. 총 14회의 시위가 확인되는데, 3월 2일부터 8일 사이 8회, 15일에 1회, 31일에 4회, 4월 5일에 1회의 시위가 발생하여 총 14회의 시위중 3월 상순에 8회가 집중되어 있었고, 나머지 6회 중 5회는 3월 말~4월 초에 포진하고 있어 시위가 3월 초와 3월 말~4월 초 사이로 양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判決文」 · 「身分帳指紋原紙」 등 일제의 수형자료를 근거로 참여자를 분석해보면, 확인되는 참여자 중 연령별로는 20~30대가 38명 (77.5%)으로 가장 많았고, 직업은 농업이 25명(51%)이었고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죄명은 파악되는 45명 전부가 ‘保安法違反’이었다. 刑名 · 刑期를 보면 전체 46명 중 태 90도가 5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징역형인데 가장 많은 25명이 받은 것은 징역 6월형이었다. 3.1운동의 대부분은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각각의 시위는 해당지역의 인문사회 환경과 함께 참여자들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3.1운동의 전체상 파악은 그 낱낱의 사례를 연구하는 것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본 연구는 그것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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