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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청석령곡」 연구

2019 
이 글은 효종의 「청석령곡」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고, 이 작품의 후대 전승 양상과 거기에 나타난 수용자의 태도를 살펴본 것이다. 지금까지 효종의 「청석령곡」은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 2월 효종이 볼모로 잡혀갈 때 지은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초장에 나타난 방향성과 중장에 그려진 계절감을 고려할 때 기존 해석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당시 관련 자료를 정밀하게 검토한 결과 이 작품은 봉림대군이 심양에 있을 때 겪은 딸의 죽음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애초 이 작품은 ‘나라 잃은 슬픔’과 ‘볼모로 잡혀가는 비참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기보다는 ‘자식을 잃은 슬픔’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부왕(父王)에 대한 그리움’에 초점을 맞추어 창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후대 전승 과정에서 이 작품은 수용자의 태도에 따라 이중적으로 나뉘어 수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청석령곡」을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남용익의 「장유가」다. 여기서 남용익은 귀국길에 이 작품을 떠올리고 있다. 이로 보아 남용익은 「청석령곡」의 창작 배경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를 회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이런 남용익의 수용 태도는 아주 소수에 그치고 있고 다수의 수용자들은 1637년 2월 효종이 볼모로 잡혀갈 때 지은 것으로 이해하고 연경을 향하는 도중에 이 작품을 떠올리고 있다. 이런 수용 태 도를 보이는 사람들은 창작 장소를 바꾸거나 가사를 변개하는 등의 시도를 통해 효종이 볼모로 잡혀갈 때 「청석령곡」을 지었다는 것을 적극 합리화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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