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완 사행문학의 양상과 의미

2015 
본고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윤지완(尹趾完)의 사행록 「승사록(乘槎錄)」을 소 개하고 일본인과의 창수시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았다. 윤지완의 「승사록」은 본문ㆍ부록ㆍ별록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는 총 62제 80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그 중 31제 32수가 일본인과 관련된 시로 반 가까이가 일본인과의 창수시이며, 「유후상질(留侯像質)」ㆍ「답수호후원광국서 (答水戶侯源光國書)」ㆍ「서경윤송지구서잉제소서이증(西京尹送紙求書仍題少 序以贈)」라는 일본인에게 보내는 글도 수록되어 있다. 부록은 일본인이 윤지완에 게 보낸 시문을 엮은 것으로, 일본인 10인의 시문 32수와 문 3편이 실려 있다. 부록에는 윤지완이 사행 전 21명에게서 받았던 신장(贐章)이 수록되어 있다. 일 본인의 시문을 정리하고 있다는 점, 역관 2인의 사행록만이 남아있는 1682년 사 행에서 삼사신(三使臣)의 필담창화의 실재를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라는 점, 서 얼 문사 중심의 사행 문학 연구에서 시문으로 구성된 정사의 사행록이 추가되어 새로운 연구 시각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에서 가치 있는 텍스트이다. 윤지완은 크게 승려․유자․고위 접대역 계층과 시문을 주고받았다. 승려들은 쓰시마에서 에도까지의 사행을 호행하며 조선인과 일본인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통신사에게 이들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윤지완의 시에는 일본인 의 시문에 대해 칭찬하는 구절이 다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유자들을 만났을 때에 는 내재되어 있던 불교에 대한 배척이 드러났다. 승려들과의 창화는 사행 여정 동 안의 안정과 편의를 위해 일본인의 시문 요구에 부응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윤지완은 유자들에게도 시문의 역량을 높이며 칭송하곤 했는데, 윤지완은 일본인과 의 시문 교류를 시문을 다투는 장으로써 받아들이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마지 막으로 관반들에게는 공적인 행위로서 시문의 창화가 이뤄지기도 했다. 정사(正 使), 즉 ‘실무형 외교전문가’로서 통신사를 대표해 접대에 대한 감사를 시라는 수 단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윤지완은 외교의 장에서 시문의 역량과 가치를 중시했다. 일본인들이 이러한 인식 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었을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결국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양국 인의 시문 교류는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가치관에 알맞은 행위를 좇는 행위였고, 윤지완도 문치주의 조선의 사대부로서, 사행의 정사로서 시문창화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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