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왕의 비망기(備忘記)연구
2014
이 글은 조선시대 비망기를 중심으로, 왕명의 전달과 체계 등을 살핀 연구이다. 조선시대에 비망기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단정할 수 없으나 중종대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 선조대에 이르면서 거의 정착되었다. 이는 16세기 이후 공론정치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국왕의 입장에서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망기는 내시가 담당하는 承傳色이 주로 작성하며, 간혹 액정서 소속의 司謁이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작성된 비망기는 주로 승전색을 통해 승정원에 전달된 뒤 해당 관서에 하달되었다. 비망기는 대부분이 승정원에 내려지지만 備邊司등에 하달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주로 특정의 관서에 전달되는 내용이었다. 비망기로 하달된 명령은 그대로 국왕의 傳旨로 만들어져 내려지기도 하였다. 비망기는 대신이나 고위 관원 혹은 山林들에게 국왕이 별도로 내리는 돈유나 별유 등과 함께 다양한 政令을 전달할 때 이용되었다. 정령 중 비망기로 내려지는 사항은 다양하여, 주제별로는 왕실이나 인사 외교 군사 사법과 관련된 내용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활용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비망기가 조선후기 숙종대 이후에는 주요 정치적 사건에 활용되며 국왕의 입장에서 정국의 전환을 꾀하는데 중요하게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조선 후기에 비망기가 광범위하게 활용된 이유로, 비망기가 국왕의 의도를 잘 보여주며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비망기는 구전하교와 비교해볼 때 그 층위가 달랐다. 구전하교 역시 다양한 내용으로 내려졌으나, 조보에 반포하지 않거나 혹은 반포하지 말라는 지시가 구전하교로 하달되었다. 또한 비망기에 대한 후속 조치 등이 구전하교로 내려졌다. 인사의 경우도 구전하교는 그 대상 관직이 내시를 비롯해 하위 관직이었고, 비망기는 그 보다는 당상관 이상을 대상으로 하였다. 비망기는 조선시대 다양한 왕언의 체계 중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된 경우였다고 판단된다. 이는 비망기의 성격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언에는 교문, 윤음, 비답, 판부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 중 교문과 같은 경우는 국가의 문한 제도라는 틀 속에서 작성되었기에 절제된 언어로 작성되어 국왕의 세밀한 심정까지 전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비답은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간결하고 신중해야 하였다. 판부는 정형성을 갖고 있기에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기에 유효한 수단은 아니다. 이에 비해 비망기는 政令을 하달할 때 국왕의 의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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