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의 반일성(反日性) 연구’를 위한 연구사적 검토

2016 
이 글은 ‘보천교의 반일성’을 연구하기 위한 시론이자 연구사 정리다. 보천교는 기본적으로 반일성을 갖는다. 일제강점기에 보천교는 일제의 수많은 탄압을 받았고 그 탄압으로 보천교는 해체되었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 보천교를 탄압했을까? 일제가 보천교를 사이비 종교라서 탄압하였을까? 아니면 식민통치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탄압하였을까? 일제가 보천교를 탄압하면서 남긴 수많은 자료에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보천교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금을 모았다.” 이 글은 보천교의 연구 현황을 200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대체의 관련 연구는 보천교의 반일성, 더 나아가 보천교의 민족성까지 언급하였다. 하지만 근래에 보천교의 민족성을 부인하는 글이 발표되었다. 따라서 보천교 연구의 최대 쟁점은 ‘보천교의 민족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천교의 반일성’에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관련 연구에서 뿐 아니라, 일제가 남긴 수많은 자료에서 보천교의 반일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후반부에서는 향후의 관련 연구의 방향성을 ‘예시’와 함께 제시하였다. 특히 보천교의 반일성을 엿볼 수 있는 사건들을 시대 순으로 구성하면서, 그 특징들도 함께 소개하였다. 이러한 예시가 향후의 관련 연구를 하는 데 있어서 참신한 착안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피력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식민지 한국은 ‘전통’과 ‘문명’이라는 명분이 혼재돼 있었다. 당시의 전통이란 왕조시대에 지키고자 한 ‘정(正)’보다는 배척하고자 한 ‘사(邪)’에 가까웠다. 신문이나 잡지 같은 언론에서는 문명의 저 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보천교를 계몽의 대상이라 하였지만, 당시에 적지 않은 민중은 보천교운동에 관심을 보였다. 계몽의 대상으로 지목된 그들, 즉 민중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향후의 관련 연구는 보천교운동에 참여한 그들의 언어로써 그들의 생각을 추적하는 작업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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