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담창화집 『홍려필담(鴻臚筆談)』에 대하여 - 위작과 그 의의를 중심으로 -

2016 
본고는 일본 가가와대학(香川大学) 간바라문고(神原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홍려필담(鴻臚筆談)』에 대해 소개하고 분석했다. 『홍려필담』은 1711년도 통신사(辛卯․正徳)의 정사 조태억(趙泰億), 부사 임수간(任守幹), 종사관 이방언(李邦彦), 제술관 이현(李礥) 등과 당시 에도 막부의 집정관이었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주고받은 서간문 및 필담이 기록되어 있는 텍스트이다. 아라이 하쿠세키의 처남인 구사카베 가게히라(日下部景衡)가 편집한 텍스트이자, 아라이 가문의 가장본(家藏本)으로서 ‘비서(秘書)’로 소장되어 왔다고 지어(識語)에 기록되어 있다. 『홍려필담』에는 14편의 서간문 및 필담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고비(古碑)․전각(篆刻)․종이 등 양국 문화에 대한 많은 화제가 제시되는 필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에서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일본 ‘다호비(多胡碑)’의 탁본 문제가 기록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현재 학계에서 다호비에 대한 정보는 1763-4년 조선통신사가 일본학자 사와다 도코(沢田東江)를 통해 조선에 들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와다 도코 및 주변의 인물들과 1764년도 사행단원의 교류를 담은 『경개집』이라는 필담창화집을 확인한 결과, 『홍려필담』은 『경개집』을 거의 그대로 베낀 위작 텍스트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장서인 등을 통해 고증해보면 『홍려필담』은 1711년보다 적어도 150년 이상 후대에 작성된 텍스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작이 확실시 되는 부분은 『홍려필담』의 필담 부분으로, 앞쪽에 실린 서간은 위작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만약 서간 부분이 실제 아라이 하쿠세키와 통신사가 남긴 기록이라면, 1711년도의 조일 교류뿐만 아니라 조태억과 이방언의 대일인식 및 아라이 하쿠세키의 조선인식을 보여주는 단서로서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위작을 작성한 의도에 대해서는 확정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아라이 하쿠세키와 조선통신사의 만남이 있었던 1711년에서부터 적어도 150년 이후 아라이 하쿠세키가 다시 호명되었고, 더불어 조선통신사도 재언급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본 내에서 통신사를 둘러싼 필담창화집이 위작을 발생시킬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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