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우(申錫愚)의 『입연기(入燕記)』를 통해 본 조선의 국제정세인식

2019 
申錫愚(1805-1865)는 哲宗11년(1860년) 11월 冬至使行을 통해 제2차 아편전쟁 이후 北京의 혼란한 상황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지배층의 현실인식 일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신석우가 연행을 떠난 것은 哲宗11년(1860년) 겨울이다. 연례적으로 파견하는 동지사행의 정사로 임명되었다. 신석우 일행은 1860년 11월 26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에 들어섰다. 동지사행은 12월 24일 북경에 도착했으며, 다음해(1861년) 2월 6일까지 체류하다가 북경을 떠났다. 3월 27일, 동지사행 일행은 귀국하여 국왕에게 복명하였다. 신석우가 사행을 떠난 시기의 청은 대내외적인 정세가 매우 불안정하던 때였다.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로 인해 청은 1858년 6월 天津條約을 체결하였다. 조약 체결 후, 다시 영불연합군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그 결과 10월 24일 영불연합군은 천진조약을 계승 확대한 北京條約을 체결하였다. 소위 말하는 ‘北京事變’ 이후 중국인들은 서구열강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자괴감과 각종 재난으로 인해 불만이 생겼다. 이는 빈번한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신석우는 이러한 청의 정세에 대해 김경수의 을 통해 파악하고 현지에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신석우는 귀국 후 국왕에게 복명하는 자리에서 청의 현실을 축소하거나 안정된 상황만을 강조하여 보고하였다. 이는 조선지배계층의 대외인식과 대응방식을 반영한 보고였다. 당시 조선 지배층은 청조의 안정이 국내의 안정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권력이 독점되면서 안주할 수 있는 世道政治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제적인 변혁의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신석우는 국제정세에 대한 뛰어난 인식능력과 분석력을 갖고 있었으나 권력구조 안에서 정권의 안보를 고려해 정치적 의도에 맞춰 정보를 해석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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