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惠恭王의 弑害와 歷史的評價에 대한 考察

2018 
본 논고는 신라 惠恭王代에 일어난 여러 반란 사건의 성격 및 그 발생 배경, 혜공왕의 시해 주체, 그리고 혜공왕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金邕·金良相勢力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大恭兄弟가 혜공왕 4년(768)에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다. 이때 지방에 거주한 진골귀족과 都督·仕臣을 비롯한 지방의 首領들이 대공형제의 반란에 동조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金融, 金隱居, 廉相과 正門등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혜공왕대 후반에 잦은 자연재해와 眞骨貴族의 과중한 收取로 농민들이 동요하여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金志貞등이 780년(혜공왕 16) 2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2개월만에 김양상 등에게 진압되었다. 반란의 와중에 김지정 일파가 혜공왕을 시해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김양상이 여러 신료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下代, 즉 새로운 시대의 序幕을 열었다. 聖德大王神 鐘銘에서 혜공왕을 聖君으로 묘사하였지만, 의례적인 讚美에 불과하고, 당시 신라인의 혜공왕에 대한 인식을 객관적으로 전하였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삼국사기』의 찬자는 혜공왕은 음악과 여자에 빠져 놀다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인물로 평가하였다. 한편 『三國遺事』의 찬자인 一然은 男尊女卑思想에 입각하여 혜공왕대 후반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은 女性인 만월태후의 섭정과 女性으로서의 性정체성을 지닌 혜공왕의 失政으로 말미암았다고 인식하였다.
    • Correction
    • Source
    • Cite
    • Save
    • Machine Reading By IdeaReader
    0
    References
    0
    Citations
    NaN
    KQ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