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 『한금신보』 (1724) 편찬자의 음악적 배경

2013 
『한금신보』는 1724년 응천(凝川) 후인(後人)에 의해서 한립(韓笠 또는 韓立)의 악보를 토대로 편찬된 거문고보이다. 이 악보는 『금보신증가령』(1680)과 18세기 후반 『유예지』 사이의 거문고 음악의 변천을 밝혀주는 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는 거문고보로 주목되었다. 그러나 『한금신보』를 편찬한 응천 후인이 어떤 집안 출신이며, 어떤 역사적·사회적·음악적 배경을 가진 인물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응천 후인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그의 집안을 찾고, 다음으로 그를 둘러싼 음악적 배경이 『한금신보』 편찬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응천 후인이 어렸을 때 거주한 수명정은 소북에 속한 박이서가 1616년 마포 강가에 창건한 정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이서의 본관이 밀양 즉 응천이므로 응천 후인은 박이서의 후손 중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명정은 밀양 박씨 집안의 수신과 풍류의 공간이었는데, 응천 후인이 거문고 음악에 처음 뜻을 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명정이 위치한 한강의 삼포는 17세기 후반에 거문고 연주가인 한립과 김성기의 음악활동의 장소이기도 하다. 응천 후인 집안은 당시의 정계에서 소외받던 소북임에도 불구하고 장악원 및 성균관의 음악을 관장한 관리를 계속해서 배출하였다. 이것은 악(樂)을 애호하는 집안의 분위기와 더불어 악(樂)의 중요성을 알고 항상 가까이 하며 직접 익히고자 노력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응천 후인이 『한금신보』를 편찬하면서 『악학궤범』을 상당량 인용할 수 있었던 점도 장악원 관리를 배출한 집안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응천 후인의 선조인 박노는 당시 청나라 통으로 수년간 청나라를 다녀왔고, 청에서 들여온 서적을 집안에 소장하였다. 그래서 응천 후인은 『형천패편』과 『만보전서』의 음악 관련 기록을 『한금신보』에 직접 인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금신보』에는 이전의 악서와 거문고보에 수록된 금론 외에 다양한 중국의 악론과 금론까지 수용될 수 있었다. 한편 응천 후인은 『한금신보』를 편찬하면서 『양금신보』의 금론을 다수 인용하였다. 이것은 『양금신보』의 간행을 담당한 김두남과 박노의 음악적 교유가 있었고, 후대에 집안 간의 혼인으로 이어진 인맥을 통해서 응천 후인이 『양금신보』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고 인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까지 응천 후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친필 자료가 공개되지 않았지만 현재 밀양 박씨 충헌공파 집안의 문헌자료가 활발하게 정리·공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추세라면 『한금신보』는 응천 후인이 직접 작성한 친필본이기 때문에 친필 비교를 통해서 머지않아 응천 후인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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