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일통의식의 형성 시기에 대한 고찰

2016 
삼한일통의식이 7세기 말 8세기 초에 형성되었다는 기존 설을 부정하고, 이 의식이 9세기 후반에 형성되었다고 여기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에 기술된 삼한 기사를 검토하여, 신라에서 삼한 의식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일본서기에 기술된 ‘삼한’ 기사를 검토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즉 ‘삼한’은 삼국을 뜻하며, 삼국은 모두 일본에 시종 종속적인 번국(蕃國)이었다고 여기었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빨라도 7세기 중반 이후에 형성된 것이었다. 645년에 일어난 대화개신(大化改新) 직후, 왜국 조정이 고구려 사절에게 전한 말에서 고구려왕을 신의 아들(神子)이라 표현하여 공경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일본서기 천지(天智) 원년(662) 12월조에 기술된 ‘삼한’을 언급한 기사의 일부는 중국 책 문선(文選)의 서도부(西都賦)의 기사를 원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서도부의 ‘구주(九州)’라는 단어를 일본서기에서는 ‘삼한’으로 바꾸어 기술하였다. 수·당대의 삼한 용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예이다. 삼한을 구주(九州)나 천하와 같은 뜻으로 여기는 이러한 일본서기의 ‘삼한’ 개념은 신라로부터 도입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그 뒤 삼국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삼국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겼다. 668년 신라가 일본과 국교 재개를 한 뒤, 669년부터 신라가 당과 교전을 벌림에 따라, 신라는 일본의 지원을 바라게 되었고, 최소한 일본의 중립을 유지키 위해 진력하였다. 그런 가운데서 일본은 신라에 대해 우월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 일본을 달래려고 신라는 물자를 보내는 등 저자세 외교를 감수하였다. 아울러 백제 땅이었던 금마저에 자리 잡은 고구려 유민의 나라인 소고구려도 신라의 통제 하에서 일본과 교섭하면서 시종 저자세를 취하였다. 676년 신라와 당 간의 군사적 대결이 휴전 상태가 된 이후에도 이런 측면은 당분간 지속되었다. 이런 신라와 소고구려의 일본과의 교섭 양태와, 그리고 일본 열도로 이주해 간 삼국 주민들의 열악한 형편은 당시 일본인들의 삼국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삼국 모두 일본에 굴종적인 약소한 나라들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런 인식이 역사 서술에 반영되어, 거슬러 삼국과 일본과의 교섭 초기부터 그러하였다는 식의 기술을 낳게 하였다. 이런 식의 인식이 성립한 것이 언제 부터인가를 생각할 때, 유의되는 것이 신공황후전설에 대한 고사기와 일본서기 간의 기술의 차이이다.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에선 신공황후가 신라를 원정하니, 삼한(三韓) 즉 삼국 모두가 항복해왔다고 하였다. 그에 비해 712년에 간행된 고사기(古事記)에서는 신라와 백제가 신공황후에게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을 삼한으로 지칭하고, 삼한이 시종 일본의 종속국이라는 서술이 등장한 것이 720년 이후였음을 말해준다. 곧 삼국을 삼한이라고 칭하고 그것이 신라로 통합되었다는 신라인의 인식이 7세기 후반 이후 일본에 전해졌고, 다시 그러한 삼한이 거슬러 이른 시기부터 일본에 종속국이었다는 식으로 일본식의 삼한인식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역으로 신라에서 삼한일통의식이 7세기 종반에는 형성되었음을 추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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