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末 濟州義兵抗爭의 재조명

2018 
본 연구는 제주의병의 개별적 활동에 국한된 연구를 뛰어 넘어, 의병항쟁이 지향하는 사상적 기반과 이전의 농민항쟁 영향에 대해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의병항쟁의 동력에 대한 근원적 성격을 밝히고자 하였다. 韓末에 大靜郡을 중심으로 전개된 여러 차례의 대규모 농민항쟁은 제주도 농민의 기질과 열악한 사회경제 구조 속에서 봉건적 지대와 조세를 통한 수탈이라는 구조적 모순에 저항한 反封建운동이었다. 이 때 형성된 저항 역량은 결국 1909년 의병항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濟州島는 江華島條約이 체결된 이후 일본인들의 어업 근거지가 되면서 침탈을 겪고 있었는데 韓日議定書가 체결되면서 더욱 노골화된 침략정책은 濟州島民의 전통적인 삶의 질서의 붕괴를 초래했다. 統監府 체제가 본격화되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亡國이 현실화 되면서 직접적 침탈에 직면하게 되자 濟州 사회는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되었으며, 島民들이 의병에 참여하거나 협조하는 계기가 형성되었다. 의병주도세력은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최선은 항쟁으로 대응하는 길이라고 판단했으며, 이는 거병 동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즉, 봉건정부의 핍박으로부터 일어난 농민항쟁을 거치면서 제주사회 내에 항쟁동력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면서 의병항쟁으로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농민항쟁세력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함으로써 의병항쟁에 어떻게 融合되는지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이다. 蘆沙學派와 일정한 연계를 가졌던 젊은 儒生들은 학파의 지도자들로부터 계승한 이념적 기반을 토대로 지도력과 인적 관계망을 갖추었고, 이는 의병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학파의 이념에 따라 舊制度의 부활을 표방했던 것은 농민항쟁에서 나타났던 反封建運動에서 일정부분 후퇴하는 본질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고, 유생 중심의 전형적인 斥邪義兵을 답습하고자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그럼에도 유림계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참여 계층이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생은 물론 농민과 하인, 전직 일본 경찰까지 가담하였으며 상당수 마을 주민들의 참여가 이루어졌고, 본토의 의병세력인 전라남도의 의병과도 연계된 광범위한 연합이었다는 점은 민중주의적 사회·경제운동을 함유한 제주의병의 독자성을 두드러지게 하였다. 본 연구는 한말 제주사회의 혼란과 일제의 침탈과 만행, 통감부 체제에 의해 정치·경제·사회체제가 유린되는 상황을 분석하여 제주의병 거병의 배경과 동기를 밝히고자 했다. 또한 그 창의과정에서 발견되는 특징들과 제주의병의 조직에 드러난 참여계층, 이념, 학문적 연관관계를 구명함으로써 의병항쟁을 입체적으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기존자료를 재검토하고 새로 발굴된 문서를 활용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말 제주의병항쟁이 가진 성격과 특징을 보다 분명히 하는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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