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에 대한 유교계와 불교계의 인식

2013 
유교에서는 예로부터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해 왔다. 이에 대해 불교 출가자는 부모와 처자권속과 세속의 명리를 버리고 수행에 전념하므로 세속의 충과 효와는 거리가 멀었다. 불교에서 비록 군주에 대해 충성을 다한다는 의미는 없으나 국왕의 은혜에 대해 보답한다는 사상은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장으로 활약한 사명당 유정에 대해 밀양의 유림과 승려들은 조선중기에 표충사라는 세속의 이름을 가진 사당을 세워 향사를 지내고 있다. 불충불효한다며 불교를 억압했으면서도 ‘충성을 드러낸다’는 세속적 의미를 가진 사당인 표충사(表忠祠)가 사찰 안에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후 각 지역의 유림들은 서원을 건립하고 향안을 중수하고 향약을 제정함으로써 전란을 통해 흐트러진 향촌사회의 질서를 복구하는 일을 통해 향촌지배세력 상호간의 결집과 동질성을 강하게 유지하려고 했다. 밀양 유림들도 삼강동에 지역출신의 의병장을 추모하는 사당을 만들면서 임진왜란 당시 의승장으로 활약한 유정의 사당을 만들기를 건의했고 승려들이 모연하여 표충사를 지었다. 유가에서는 유정(惟政, 1544-1610)이 승려이긴 하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에 강화사로 들어가 조·일통화를 이루고 끌려간 동포들을 쇄환한 동향의 충신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향촌의 재지세력들은 양반사이의 결속을 도모하고 서민들에 대한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표충사를 건립했다. 불교에서는 사명당 유정을 국왕과 백성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보살행을 한 고승으로 추모했다. 표충사 승려들은 유정을 춘추로 제향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일반 사우의 사례에 준하는 지위를 얻고자 했다. 충신으로서의 유정을 사당에서 제향함으로써 각종 혜택을 받아 사찰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했다. 불교계에서는 표충사가 사액서원이 되면서 전지 5결의 위전(位田)을 지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찰내에 유생들의 출입을 통제할 수 있었고 잡역을 면제받았다. 그리고 표충사 향사를 주관하는 자는 승풍을 규정하는 선교도총섭이 되었으므로 사격을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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