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자대재(筑紫大宰) 성립에 대하여 -외교 교섭 및 불교 수용을 중심으로-

2016 
본고에서는 大宰府의 전신인 6~7세기의 축자대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주요 요인을 탐구하고자 했다. 축자대재의 성립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었지만, 필자는 왜와 한반도의 외교교섭 특히 백제와의 교섭을 중시하였다. 종래 推古朝 對隋 외교에 비중을 두어 축자대재라는 관제가 성립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실제로 수와의 교섭은 2차례였고, 한반도 제국, 특히 백제와는 빈번하게 교섭하였다. 백제는 6세기를 통해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빈번하게 왜와 교섭을 하였다. 한반도의 긴장 고조로 말미암아 왜로부터 군사지원을 필요로 한 백제는 그 반대급부로 유교경전과 불교 등 선진문물을 왜로 전수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와 신라도 왜와 다양하고 빈번한 외교 교섭을 가졌다. 한편 군사외교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전래한 불교를 왜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것도 축자대재 성립의 한 요인으로 지적해 보았다. 敏達朝에 ``宰``(미코토모치)라는 용어가 나타나며, 한반도와의 외교교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宰``는 대왕의 命을 받든 자로서 한반도로 파견되는 사신을 칭했다. 축자대재란 筑紫의 ``大宰``(오호미코토모치)이다. 한반도에 파견되어 외교적 직무를 수행하였던 ``宰``와 마찬가지로, 중앙에서 축자지역에 파견된 사신이 정비·발전된 것이 ``筑紫大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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