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와 류큐사절단의 筆談(對談)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를 중심으로-

2014 
본고는 1711년 신묘통신사행을 보다 객관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를 위해 동시대 일본에서 이뤄졌 던 외국인 행렬인 류큐사절단과 비교했는데, 18세기 초 막부의 집정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 가 조선통신사가 나눈 필담을 정리한 『강관필담(江關筆談)』과 류큐사절단이 나눈 필담을 정리한 『백석선생 류인문대(白石先生琉人問對)』를 주 텍스트로 이용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1682년과 1711년 통신사와 접촉했는데, 『강관필담』은 1711년 조선 측 삼사(三使) 등과 나 눈 필담을 정리한 것이다. 『백석선생류인문대』는 1710년과 1714년 류큐사절단을 만나 대담한 기록으로 보인 다. 이 시기 아라이 하쿠세키는 막부의 행정을 주도하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위치에 따른 대담이 오갔다. 『강관필담』의 경우 아라이 하쿠세키와 조선통신사들 간에 자국에 대한 과시와 견제가 깔려있으나 우호와 사 귐의 정을 나누며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도 나타났다. 대등한 관계에서 그 동안 쌓아놓은 지식을 표출하며 필담 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백석선생류인문대』의 경우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일방적인 질문과 류큐 인 상대의 대답으로 이루어져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류큐에 대한 정보를 서적을 통해 습득하던 중 발생한 질 문들을 문목으로 만들어놓고 류큐 사절을 만나자 질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라이 하쿠세키에게 있어서는 자주 접할 수 없는 류큐인을 통해 이국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는 기회였던 것이다. 두 텍스트에 모두 드러나는 것은 ‘중국’에 대한 아라이 하쿠세키의 관심이다. 그런데 이 관심이 표출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백석선생류인문대』의 경우, 여러 차례 중국에 대한 질문을 류큐인에게 던지며 자신의 호기심 을 드러냈다. 반면, 『강관필담』에서는 중국 문헌을 인용하며 중국에 대한 지식을 표출하는데 집중한다. 중국 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고, 일본이 중화의 제도를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강조하는 ‘내세우기 외교’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 속에는 조선에 대한 견제와 조선과 동등한 선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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