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bate of Transferring Capital of Seokyung and the Thoery of Fungshui of Goryeo Dynasty in King IN-jeong Era

2018 
태조 왕건은 고려왕조를 창업하면서 고려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이 하늘의 수명을 받은 존재임과 동시에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 왕조임을 강조하였다. 먼저 자신의 수명의식은 󰡔高麗史󰡕 세계편과 훈요십조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 태조의 수명의식은 풍수지리사상과 연동되어 등장하는 특색이 있다. 이러한 왕건의 신성성은 훈요십조에서도 확인이 된다. 다음은 신라의 승계여부이다. 태조 왕건은 고려가 신라를 승계했음을 밝히기 위하여 선양과 궁예 정권의 계승문제를 중시하였다. 이 부분을 정리한 이후 고려는 수덕이 강한 서경경영에 적극적이었다. 정종대 서경천도 계획뿐만 아니라 성종대는 서경의 10월 치제의 정형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서경중심질서는 예종대에 어긋나기 시작하였고, 이를 인종대에 바로잡고자 하였다. 인종은 이자겸 세력에 의한 자신의 즉위, 그리고 이자겸의 반란 등으로 국정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바꾸고 인종 자신이 국정을 장악하기 위하여 서경 천도를 단행하고자 하였다. 서경은 왕조의 선명성과 함께 국왕권의 강화와 직결되는 지역이다. 이를 위하여 인종은 왕안석의 신법을 모델로 과거제와 국학 운영을 일신하여 김부식 등의 반대파 세력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서경에 행차하여 유신지교를 반포하였다. 서경의 대화궁이 인종의 이러한 의도를 잘 이행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은 이지저의 상소문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서경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묘청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이후 인종은 왕안석의 반대파인 사마광의 훈검문을 찬양하고 있다. 이는 묘청의 반란이후 고려왕조에서 서경이 가지는 위상뿐만 아니라 인종의 국정기조가 바뀌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후 서경은 반역의 땅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강해졌으며 이는 서경중심질서가 바뀌어 나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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