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극동 소련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계획과 이주 과정 - 1937년 이주문서를 중심으로 -

2021 
이 연구는 소련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가 어떻게 계획되었는지, 이주 실상은 어떠 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1937년 8월 21일부터 1937년 12월 19일까 지 구소련에서 작성된 주요 이주 문서 아카이브(АП РФ, ГАРФ, РА ИПСИ ЦС НДПУ, РГ АСПИ, ЦА ФСБ)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연구를 통해 나타난 내용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첫째, 강제이주의 주요 원인과 배경 으로는 일본의 첩보 활동에 한인들의 이용을 막기 위한 것이며,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반소 비에트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극동 지역에서 카자흐와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한인 이주비용은 가구당 6,000루블이었다. 이 중에서 소련 정부는 극동 지역에서 화물 열차 한 가족 운송 비 용 750루블, 가족 음식, 의료 및 문화 서비스에 250루블하여 1,000루블을 지불하였고, 남겨 진 개인 및 콜호즈 농작물에 대한 지불 및 개별 건물, 재고 등의 대가로 2,000루블을 지불받 을 수 있도록 할당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3,000루블은 생계와 건축 등을 위해 지원받는 금액 인데 그것도 대출형식이었다. 셋째, 한인들의 중앙아시아로 이주 과정은 이주 방침과 실행과는 달랐다. 이주열차의 80% 가 지침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알려진 강제이주 열차 탑승 인원과 첫 열차 출발 날 짜도 달랐다. 강제이주 총 인원은 극동 지역 출신 한인 36,442가구 171,781명보다 많은 36,681가구 172,600명이 이주했다. 강제이주자가 실제 이주자 수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면 극동 지역에 거주하는 미등록 한인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주 첫 열차 출발 날짜는 계획과는 달리 조정되어 모두가 9월 9일이 아닌 9월 10일이었다. 그리고 강제이주 열차는 음식과 식수 문제, 화장실 문제, 열차에서의 호위(반혁명·사보 타지 등에 대비)직원들의 활동으로 이주자 통제, 환자 발생 시 보건 문제 등이 가장 어려웠 을 것이다. 한편, 강제이주 과정에서 사망한 한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망자는 하바롭스크 근처 열차 충돌 희생자를 포함하여 673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특히 이동과정에 서 열차 충돌 사고는 테러라는 측면에서 보면 안전 문제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 열차 사고는 일본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는 스파이 조직이 행한 것이었다. 또한 강제이주 한인열차 충돌 조사 결과 김 아파나시가 일본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증언은 없었다. 조사에서는 김 아파나시를 일본 정보부의 간첩으로 1937년 강제이주 한인 열차 충돌 사고와 연관시켜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한인 강제이주 실상에 대해 밝혀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비밀이 풀리지 못 한 채 남지 않아 있다. 그래서 새로운 자료 발굴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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