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20년대 수원지역 근대관광의 실태

2019 
본고는 1910~20년대 수원지역 근대관광의 실태를 당시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본고를 작성한 이유는 신문기사가 이 시기 수원지역 근대관광의 실태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수원지역의 근대관광은 1910년대 이래 1920년대까지의 수원관광단의 추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수원을 찾은 관광단의 수는 모두 154개였으며, 1910년대는 관광단ㆍ시찰단이 주로 찾았으나 1920년대가 되면 수학여행단이 급증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주로 찾은 곳은 권업모범장, 수원농림학교 등 근대 시설이었으며, 화성을 중심으로 한 고적은 아직 두드러지지 않음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931년 조직된 수원보승회의 활동은 향후 화성을 중심으로 수원의 관광지가 확대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계기로 개최지인 경성은 물론이고 수원을 비롯한 인천, 개성, 고양 등의 경기도 일원, 그리고 금강산까지도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광개발이 본격화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근대관광에 대한 연구가 식민지 근대화론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필자는 오히려 이의 연구를 통해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관광을 주도한 세력이 보여주고자 한 것이 어떠한 성격의 것인가를 분석함으로써 근대관광을 통해 일제가 목적으로 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 확인했듯이 수원지역의 주요 관광지가 권업모범장과 수원농림학교라는 것은 근대시설을 관광자에게 직접 보여줌으로써 일제의 조선 지배가 조선을 근대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눈으로 확인시키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는 일제의 관광정책의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근대관광의 기본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수원지역의 근대관광을 살핀 것은 이러한 근대관광 연구에 대한 일부 연구자의 시각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 Correction
    • Source
    • Cite
    • Save
    • Machine Reading By IdeaReader
    0
    References
    0
    Citations
    NaN
    KQ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