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일본인(在朝日本人) 토목청부업자 아라이 하츠타로(荒井初太郞)의 한국진출과 기업활동

2011 
본고는 한말에 한국에 진출하여 주로 일제하에 활약했던 아라이(荒井初太郞)라는 일본인토목청부업자에 관한 연구이다. 아라이 뿐만 아니라 경성상업회의소 회두를 지낸 와타나베(渡邊定一郞)나 진나이(陣內茂吉) 등이 토목청부업자 출신이었음을 고려할 때, 일본인 토목청부업자에 대한 사례연구는 일제하 한국경제사를 이해하는데 일조하게 될 것이다. 아라이는 젊은 시절 자유민권운동 과격파에 경도되어 1885년의 오사카사건과 1892년의 선거대간섭 등에 참가했고, 호쿠리쿠선 건설붐이 일면서 토목청부업에 뛰어들었다. 고향인 토야마현과 홋카이도에서 주로 철도부설공사에 참가했던 아라이는, 1904년에 대외강경론자인 오가와(小川平吉)와 우에노(上야安太郞)의 권유로 한국으로 건너가 경부철도속성공사에 참여했다. 이들의 도한은, 토목청부업자들이 러일전쟁의 수행이라는 국책을 뒷받침하면서도 자신들의 사익을 일치시킨 결과였다. 경부철도속성공사가 끝난 뒤에도 아라이는, 한 때 만주에서 안봉선 개축공사에 참여기도 했지만, 주로 조선을 활동무대로 철도공사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라이의 기업활동 분야는 부동산, 토지신탁, 수리조합 경영 등으로 확대되었고, 1930년대에는 창고금융업, 전시기에는 광산업에 각각 힘을 쏟았다. 이런 경영의 다각화는 각 시기별 유망산업을 선별하여 투자활동을 전개한 결과였다고 풀이된다. 아라이는 1920년대 중반에 이미 ``조선재계``의 중진으로 성장하여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는데, 당대한국재계 최대의 현안이었던 ``인취이전문제``, 즉 인천미두취인소의 경성이전 문제의 해결에 앞장선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아라이의 토목청부업자로서의 성장배경에는, 젊은 시절부터 몸에 익힌 정치감각, 정재계의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토목청부업자에게 필수적인 기술력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특히 식민지기 한국에서 이러한 요인들은 더욱 커다란 힘을 발휘하였다. 조선총독부의식민지 통치를 위한 인프라 건설에 이들 토목청부업자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으며, 그를 통해 성장한 이들이 조선경제의 중진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식민지 권력에 협력하며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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