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첨성대의 방향과 상징성

2013 
경주첨성대의 기단은 시계반대방향으로 약 19도 회전한 동서방향을 향하는 반면, 황룡사구층탑과 분황사모전석탑의 기단은 시계반대방향으로 약 3도 회전한 남북방향을 향한다. 첨성대가 동시대에 건립된 구조물과 다른 방향을 향한 이유에 대해서는 제 1차 첨성대토론회(1973)부터 논쟁이 있었지만,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본연구는 황룡사지와 분황사뿐만이 아니라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傳인용사지, 동궁지, 재매정지 등 7세기경의 대부분 주요 건물기단이 정남에서 시계반대방향으로 약 3도 회전해 있음을 발견하였다. 사천왕사의 중심도 선덕여왕릉을 기준으로 정남에서 시계반대방향으로 약 3도 회전한 각도에 정확하게 놓여있었다. 계림북편건물지에서 첨성대와 동일한 각도로 회전한 기단을 발견했으며, 첨성대남편건물지에서도 마찬가지로 회전된 기단을 발견하였다. 첨성대와 동일한 각도로 회전한 이 2개의 기단은 놀랍게도 황룡사구층탑의 중심과 일직선상에 놓여있었다. 약 19도 회전한 첨성대 기단의 西面은 장윤성 외(2009)의 주장대로 추사 김정희가 진흥왕릉으로 지목한 왕릉을 향하고 있었다. 東面은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있었던 신라의 용궁을 향하고 있었다. 또한 첨성대와 선덕여왕릉은 정기호(1991)의 주장대로 경주의 동지일출방향인 동남동 29.45도에 정확하게 맞춰져 있었다. 첨성대의 西面이 진흥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을 향하는 이유는 본 연구가 명확하게 밝힐 수 없었다. 첨성대 축조를 제안한 사람은 신종원(1992)의 견해대로 隋에서 진평왕 27년(605)에 귀국한 밀교승려인 안함으로 판단되었다. ?삼국사기?는 안함이 귀국한 직후에 진흥왕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여, 안함과 진흥왕 간의 연관성을 암시하고 있으나 ?삼국사기?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이처럼 조작했던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첨성대의 西面이 용궁을 바라보았던 이유를 자은사 건립기록에서 찾았다. 자은사는 문덕황후의 도리천 상생을 위해 ‘첨성’을 통해 건립되었는데, 당고종은 황태자 시절에 “龍宮에 있는 梵文의 偈는 반드시 淸臺에 모여서 피어날 것”이라 했다. 따라서 龍宮은 부처의 은밀한 가르침을 保藏한 곳, 淸臺는 夏의 천문대가 아니라 밀교의 가르침이 발현되는 곳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첨성대는 신라용궁에 保藏되어 있던 秘法과 眞文에 기초하여 선덕여왕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기원한 석탑이었다. 첨성대와 선덕여왕릉이 동지일출방향에 맞춰져 있는 이유는 선덕여왕의 영혼을 동짓날 일출에 때를 맞추어 도리천으로 보내기 위함으로 본다. ?삼국유사?는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죽음과 관련이 있음을 전하며, ?삼국사절요?는 첨성대가 완성된 직후에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김매순(1776~1840)은 첨성대가 선덕여왕을 도리천에 묻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첨성대는 김기흥(2000)과 장윤성 외(2009)의 견해대로 선덕여왕의 도리천上生과 관련된 구조물로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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