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가람 배치의 변화와 의미

2020 
영축산을 뒤로 하고 산자락에 남향으로 지어진 통도사는 전통적으로 세 구역으로 나누었다. 진리의 부처님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응화신으로서 역사적인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영산전을 그리고 오른쪽에는 석가모니불의 입멸후 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각각 남향으로 배치함으로써 통도사는 3원 체제의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말한다. 이럴 경우 통도사의 3원제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이 대광명전이다. 자장은 율사이면서도 화엄사상가였기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통도사를 창건했다. 고려가 시작되어 수도가 개성으로 옮겨지면서 통도사가 위치한 양산은 수도권에서 멀어지면서 불교 활동의 중심지도 개성으로 옮겨갔다. 창건이후 특별한 활동이 없었던 통도사는 고려 중기에 들어와서 왕실의 지원을 받아 불교계의 주요사원으로 부각되고 남산종을 영도하는 위치로 부상한다. 왕실과 통도사를 연결시켜 준 매개는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해 주는 불사리신앙이라 할 수 있다. 고려 후기 지공(指空)이 통도사에 들어와 선(禪)과 계율을 설법한 이후 통도사는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1305(충렬31)년부터 1369(공민18)년까지 통도사에는 일주문ㆍ천왕문ㆍ불이문을 비롯해 많은 건축물들이 창건되는데 이는 통도사의 가람배치를 새롭게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다. 가장 먼저 사찰 출입이 남북에서 동서로 바뀌면서 통도사의 중심이 대광명전이 아니라 사리전이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다시피 한 통도사를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이 중창을 지시했고 이후 우운진희(友雲眞熙)에 의해 통도사는 재건하게 된다. 조선시대 통도사는 가람단ㆍ산령각ㆍ삼성각 등을 지어 백성들의 다양한 신앙형태를 받아들였다. 신도들에게 금강계단은 계를 주는 장소에서 부처님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승려들은 화엄(華嚴)ㆍ선(禪)ㆍ천태(天台)ㆍ정토(淨土)ㆍ율(律) 등을 수학하여 총림으로 자리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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