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 정신에 관한 연구

2021 
전국에서 이루어진 비폭력 독립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의 붉은 선혈로 처참하게 이루어진 결과이다. 일제는 총과 창검 등으로 만세 부르는 농민, 서민, 부녀자 등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대검과 총으로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위협받는 자유와 독립을 위한 비폭력저항 운동의 결과는 큰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는 행동은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제2차 서울 독립만세운동은 남대문 역 앞에서 학생들이 주도했다. 이화학당 프라이 교장선생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화학당 학생들은 학교 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비폭력 만세운동을 하던 중 유관순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그 이후 외국인 선교사들의 요구로 풀려나면서 바로 학교는 임시휴교령이 내려졌고 유관순의 고향 천안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동네 어른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과 서울 등지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병천 아우내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아우내 장날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수많은 군중들도 만세운동에 동참을 하였다. 체포된 유관순은 1차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고 이후 항소하여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다시 3년형을 받았다. 상고심을 놓고 조인원과 숙부 유중무가 유관순 에게 설득하였으나, 서대문 감옥에서 유관순은 삼천리강산이 어디나 지금은 감옥과 같다며 상고를 거부하고 수시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고문을 받았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옥중 만세 시위를 주도한 것이다. 옥중만세운동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에게 매를 때리고, 얼굴에 물을 붓고, 천정에 매달리게 하는 등 고문은 한층 심해졌다. 매일 이루어지는 구타, 치료받지 못한 상처, 매질, 오랜 고문 등으로 방광이 터져 몸이 썩어 들어가면서 19세에 유관순은 순국하였다. 이러한 유관순의 독립운동은 어떤 정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행동인지 파악이 되어야 할 부분이다. 유관순 열사에 대한 민족정신 부분에 정밀한 조명을 비추어 숭고한 죽음의 의미를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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