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국연예주식회사의 설립과 활동 연구

2017 
이 논문은 한국연예주식회사의 설립취지와 악극을 중심으로 한 공연활동을 재구함으로써 1950년대 중후반 극장 흥행업의 역학구조 및 악극계의 쇠퇴과정을 분석한 글이다. 1950년대 악극수요가 감소하고 공연시장의 경쟁강도가 높아지면서, 악극단 경영주들은 대작 위주, 관련 연예(entertainment)사업으로의 확장이라는 제작운영상의 생존전략을 모색했다. 일부 악극 경영주들은 대통합하여 1955년 8월 한국연예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한국연예주식회사는 대중의 위안·오락을 목적으로 한 공연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유통을 담당하고, 극장까지 구비한 대형 연예기획사 겸 제작사로서, 운영자는 이승만 정권과 유착되어 연예 영화 분야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임화수 사장이었다. ‘한국연예’는 기성 악극단의 창작진을 흡수 통합하여 전문적이고 조직적인 제작역량을 결합하면서, 악극의 대형화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다. ‘한국연예’는 악극 국극 연극 영화를 함께 제작하고, 배급과 제작이 통합된 체계적인 기업 시스템을 지향했다. ‘악극다운 악극을 하자’는 설립취지와 연중무휴 공연을 위해 자체 내 문예제작국, 기획선전국, 공연업무국, 교육출판국, 음악무용연구소, 무대미술제작소를 조직하여 악극의 기업화, 전문화를 추구하였다. 창작진 출연진 무용단악단 기획제작진으로 구성된 방대한 직영 가극단은 인기와 화제를 집중시킨 대형공연을 연속 발표했다. 이로써 ‘한국연예’는 악극활동을 통해 메이저 공연기업으로 등극하였고, 영화제작에 주력한 1957년 이후 메이저 영화사로도 성장했다. 본고는 1950년대 극장 흥행업 전반에 관한 사정을 검토하고, 악극계의 종사자들과 대중 관객의 추이를 통해 근대 대중문화계의 총아였던 악극계의 몰락, 대중문화지형도의 변모 과정을 조명한다. 악극 부흥의 자구책으로 주류 악극인이 결집된 자유가극단과 코리아가극단은 만 2년의 활동으로 단명했다. 이후 악극계는 완연히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 그 원인에 대한 답변은 남한으로 국한된 좁은 내수 시장, 무료관객이 횡행했던 비합리적 극장 관행, 육성정책의 부재 등 외부적이고 거시적인 요인에서 찾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후 복구기 촬영 여건이나 녹음 시설이 재건되면서 영화, 음반, 라디오 드라마의 보급과 상승으로 인해 인적 이동 또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 사실도 쇠퇴원인으로 제시될 수 있다. 특히 1950년대 후반 국산영화가 양적 확산과 더불어 전국의 극장가가 영화만을 상영하고 공연일정을 주지 않자, 악극계를 포함한 무대예술의 쇠퇴와 몰락을 재촉했다. 남한의 악극은 일제강점기부터 축적된 역량과 다양성이 존재했지만 그것을 견고화하기 위한 정책이나 제도가 미비했다. 심지어 한국영화처럼 제작사는 보호육성하고 영화는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이중적 정책지원마저 없었다. 오직 연예사업으로서의 위상만을 지녔던 남한의 악극은 종국에 음악의 극적 기능이나 표현기법이 축소되고 버라이어티쇼 중심으로 변모하면서, 장르적 발전이라는 온전한 수순을 밟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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