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의 환동해지역과 하코다테(函館)의 공간위상

2018 
하코다테의 개항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환동해지역(East Sea Rim)의 지도를 완성하고자 했던 서구의 오랜 욕망의 결과였다. 하코다테를 무대로 하여 서구문명사의 커다란 몇 갈래의 흐름이 만나게 되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 영국의 아시아 시장 활로 개척, 미국의 서부개척의 연장선이 모두 하코다테를 향했던 것이다. 18세기를 전후하여 서구열강의 에너지가 환동해지역에 집중되면서, 북방 경계지역에 위기의식을 느낀 에도막부는 마쓰마에 번을 강화하였고 그런 에도막부의 거점으로 하코다테가 부상하였다. 일본 북방 경계지역의 중심이 된 하코다테는 아이누를 포섭하고 착취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미일화친조약(1854) 이후의 하코다테는 하코다테 전쟁(1868-1869)과 메이지유신(1868)을 거치면서 보다 철저한 식민지 정책과 동화정책을 학습하게 된다. 선주민이던 아이누는 일본인으로서의 위상을 획득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상하관계가 존재하는 정체성 사슬에서 내부식민지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 하코다테의 위상과 아이누의 위상이 그 궤를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코다테는 일본이 서구의 제국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홋카이도라는 실험실을 관리하는 거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하코다테는 전지구적 의미에서의 변경성과 그 변경 내부에서의 중심성을 동시에 지닌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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