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王安石) 신법과 지방재정 - 북송대 재정집권의 지역차 문제와 관련하여 -

2006 
宋初의 재정운용은 五代의 연장선에 있었다. 五代 後唐과 後周代에는 直屬州를 확대하고 이로써 中央集權이 추진되었다. 특히 後周의 경우는 통일을 위해서 그 영역인 華北을 중심으로 하는 財政의 集權化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宋이 통일을 완성한 이후에도 華北을 중심으로 하는 財政을 운용하였다. 그리고 그 부족분을 發運使를 통해 江南地方에서 취하고 있었다. 兩稅의 경우는 통일에 걸맞게 전국적인 체계를 설립하였지만, 東南地域의 間接稅 收入은 그 일부만을 上供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宋初 中央集權은 정부가 표면에 내세운 방침에 불과하였다. 실제로는 정부가 征服地인 東南地方에 대해서 寬大한 政策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仁宗代에 이르러 西夏와의 전쟁으로 군비지출이 늘어나자, 정부는 東南地方의 財源에 점차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神宗代에 이르러 정부는 동남지방의 재정수입을 철저히 회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徽宗代 정부는 동남지방의 鹽稅를 비롯해 酒稅, 商稅, 雜稅와 같은 여러 수입들을 직접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 점에서 新法이 완성된 徽宗代는 史的으로 매우 의미 깊은 시대였다. 다시 말해 宋의 全領域에 대한 재정의 집권화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徽宗代에는 사치와 방종, 전쟁과 망국이라는 부정적인 얼룩이 이 時代史의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 이 시대에는 동남지방에 대하여 經制錢이라는 상공 항목을 또 하나 설정하였다. 바로 이 점이 儒家들이 주장하는 民本이나 節制와 배치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후세의 理學者들로 하여금 新法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영향으로 인해 南宋代 地方財政이 貧困하게 된 근원을 新法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남송대 地方官들은 파행적으로 地方財政을 운용하게 만든 非難의 道具로 新法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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