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대중매체에 의한 남도잡가의 공연양상 -경성방송과 유성기 음반의 남도잡가를 중심으로-

2013 
20세기 전반기의 대중매체는 전통음악문화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매개체였다. 전통음악은 ‘소수’의 향유층에게만 선택적으로 향유되었지만 대중매체의 유입과 더불어 ‘불특정 다수’의 청중에게 광범위하게 감상되는 대중적인 음악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즉 대중매체는 기존 음악의 공연·유통 방식의 일대 변혁을 야기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경성방송과 유성기 음반이라는 대중매체를 통해 변화된 남도잡가의 음악문화적 변화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남도잡가’의 범주에 포함시킨 곡목은 주로 판소리 소리꾼에 의해 주로 노래되는 곡목으로서, , , , , , , 등의 악곡이다. 1910년대 이전에 남도잡가는 그 태생지인 전라도라는 지역적 한계와 (향토)민요로서의 음악적 한계를 뛰어넘어 판소리 명창들에 의해 가창되는 잡가로 성장했다. 1910년대 중반에 남도잡가는 중앙음악계에서 널리 유포되었으며, 당시 발간된 각종 잡가집에 남도잡가가 수록되었다. 1927년에 개국한 경성방송을 통해 남도잡가는 전국적으로 널리 애호받는 대중적인 음악으로 탈바꿈한다. 남도잡가가 남도입창이라는 갈래이름으로 여성 예기에 의해 가창되었다. 1933년 경성방송국에서 조선어방송이 시작되면서 남도잡가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대중적으로 보급된다. 방송의 횟수나 빈도수가 이전 시기보다 훨씬 급증했고, 경·서도잡가에 비견될 정도로 많이 방송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갈래이름이 남도민요로 고착화되었다. 1930년대 급격하게 성장한 유성기 음반산업은 방송과는 다른 양상으로 발전한다. 방송은 청취율, 즉 대중의 반응에 그다지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여성 예기들이 주요 공연담당층을 형성했다. 그러나 음반산업은 시장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달려있기 때문에 음악적 기량이 출중한 명창들을 고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여성 및 남성 명창들이 남도잡가를 유성기 음반에 취입했다. 즉, 음반산업과 방송매체는 각기 다른 목적성을 갖고 가창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남도잡가는 1910년대 이후 남도의 한정된 지역에서 향유되던 주변부의 음악에서 대중매체를 활용하여 중앙무대에서 널리 보급될 정도의 대중적인 음악갈래로 성장했다. 그리고 여성 예기들의 노래였던 남도잡가는 당대 최고의 남성 명창들이 가창자로 등장하는 예술적인 음악으로 발전했다. 이렇듯이 대중매체는 남도잡가라는 음악갈래의 발전과 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매개체였다.
    • Correction
    • Source
    • Cite
    • Save
    • Machine Reading By IdeaReader
    0
    References
    0
    Citations
    NaN
    KQ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