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에 대한 정보 유입과 담론의 변화

2016 
본고는 일본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에 대한 정보의 유입과 이를 통한 국내 담론의 생성과 변화 살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에도시대 중기의 관료이자 유학자, 문학가로 다양한 저서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동시대 조선인에게도 통신사를 통해 알려져 후대까지 조선에서 회자되기도 한다. 1682년과 1711년 통신사와 직·간접적으로 교류를 했으며, 이때 남은 기록들이 후배 사행원 및 당대 지식인에게 하나의 정보가 되어 그에 대한 담론이 생성되어 갔다. 조선후기 아라이 하쿠세키에 대한 담론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대외적으로는 외교의 장에서 사행에 지장을 초래한 인물로, 대내적으로는 일본 사회의 관료로서 등용과 실각이 명확한 인물로, 문학가로서 시에 뛰어났던 인물로 아라이 하쿠세키는 조선인들에게 회자된다. 이러한 담론들은 유지되거나 변형되면서 아라이 하쿠세키를 언급하는 작가의 가치관과 당대 조선사회의 가치관을 드러냈다. 근대에 이르러 제1차 교육령기(1913~1920) 총독부 보통학교 독본인 《조선어급한문독본》에 아라이 하쿠세키가 박학가이자 문학가로 소개된다. 아라이 하쿠세키에 대해 교육을 받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인은 ‘성공한 박학가’에 초점을 맞추어 새롭게 아라이 하쿠세키를 인식했음이 신문기사로 게재되기도 한다. 이후 일본인 학자들이 선편을 잡은 아라이 하쿠세키 관련 연구들이 국내에 들어오는 등 아라이 하쿠세키에 대한 정보 유입 통로가 다양해졌고, 국내에서도 아라이 하쿠세키는 연구의 대상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17세기말부터 현재까지 300년 이상 우리나라에서 회자되고 있는 일본인이다. 그에 대한 담론의 생성 및 변화 과정은 각 시대별 우리나라의 일본 관련 정보 유입의 통로와 각 시대의 가치관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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