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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향한 노래

2021 
은 임금을 송축하는 의미를 가사에 담았던 노래이다. 궁중에서 연주된 용례가 세종대 부터 나타나며, 이후 사악(賜樂)의 레파토리로 활용되었던 정황이 17세기까지 남아있다. 민간에서의 연주 사례는 16세기부터 산견되며 19세기 후반까지 기생(妓生), 금객(琴客), 가객(歌客), 문인(文人) 등이 연주 주체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아울러 지방에서 연주되었던 양상도 드러나 전국적으로 향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상은 음악의 재연(再演) 공유 확산을 가능하게 하는 악보와 연계되어 금합자보(琴合字譜), 양금신보(梁琴新譜), 백운암금보(白雲庵琴譜) 등의 선율을 토대로 지속 가능했고, 특히 금합자보에 체계화 된 합자보와 목판본의 영향력을 발휘한 양금신보가 이 널리 유통되는데 일조하였다. 후대에 민간에서 편찬된 악보에 수록된 이 양금신보를 모체로 삼았기 때문에 그 가락도 여음에 서만 약간 변화가 있었을 뿐 전체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궁중 악인 출신에 의해 금합자보, 양금신보가 제작되면서 궁중에서 연행된 가락과 일정한 관련성을 지녀, 금합자보와 대악후보 권5의 선율이 친연성을 나타냈고, 양금신보와 대악후보 권6의 선율이 유사성을 띠기도 했다. 궁중과 민간에서 연주된 은 악보에 따라 악기편성에서 차이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음악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이를 통해 궁중과 민간의 음악 교류 양상을 가늠할 수 있었다. 궁중에서 민간으로 유출되어 풍류악곡으로 정착한 , , 처럼 파생곡을 형성하거 나, 악기편성을 다양하게 하는 등의 변화가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나라를 향한, 곧 임금을 향한 마음이 가사에 담긴, 지나치지 않는 고아한 분위기를 지닌 노래’라는 풍모가 문인들의 음악적 취향에 부합되어 지식층에게 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즉, 노래 가사에 깃든 ‘충군(忠君)’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왕조시대라는 시대적인 특성과 맞물려 19세기까지 긴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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