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인종대 ‘年號’ 제정을 둘러싼 갈등

2017 
본고는 고려 인종대에 드러난 신료들의 연호 제정 움직임과 그 갈등을 기존의 천하관의 관점에서 벗어나 바라보고자 했다. 궁극적으로 군왕으로서 태조 왕건과 광종의 연호 제정 의지는 인종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인종의 자세가 급박하게 전개되어 갔던 12세기 국내외 정세에 직면해 이를 컨트롤하는데 한계를 보임으로써, 신료들 사이의 연호관이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이해에 의해 표출됨에 따라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결국 고려는 인종대에 이르러 고려의 전통적인 연호관이 흔들렸으며, 제 세력들의 연호 제정에 대한 상반된 움직임과 견해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필자는 고려의 연호관이 흔들리는 시기를, 연호 제정 움직임과 이를 둘러싼 세력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충돌하였던 고려 인종대로 보았다. 귀족사회의 내분과 지역사회의 갈등이 동시에 폭발한 인종대가 이후 고려사회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을 염두에 둘 때, 시대 구분에 있어서 고려 왕조의 위상 변화를 읽어내는 데 인종대는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 요컨대, 인종대 제 세력 간의 연호 제정 움직임은 고려의 천하관과 직접 맞닿아 있지 않다. 오히려 연호를 통한 고려의 실리 외교의 한 방편이 국제사회의 변동과 함께 연동하여 흔들리는 국내 정치세력을 완만히 제어하지 못한 소산이었다고 본다. 이것이 고려시대 연호 제정 움직임에 직면한 제 정치 세력의 개입이 표면적으로 드러났던 인종대를 대상으로 삼았던 이유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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