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강(滄江) 금택영(金澤榮)의 중국망명과 출판사업 의식

2012 
이 글은 중국 망명 후, 滄江 金澤榮(1850~1927)이 망명지 중국 남통에서 수행한 출판사업의 기반을 고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김택영은 유학을 기본소양으로 한 문장가·지식인으로, ``韓末四大家``로 지칭되며 한문학의 마지막 세대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1905년 유교와 한자문명의 본산인 중국으로 망명하는데, 한인들이 많이 살던 만주나 상해가 아닌 남통을 거주지로 선택한다. 그런데 남통은 張건이 ``地方自治``를 주장하며 세운 근대적 계획도시로, 김택영은 그곳의 출판사 翰墨林印書局에서 교열일을 보며 생활의 기반을 마련한다. 김택영은 신해혁명의 시발점이 된 武昌蜂起를 보고 지은 시 「感中國義兵事」에서 혁명 이후 새롭게 도래할 서구식 제도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다가, 후에 문집을 개수하면서 이민족 국가인 淸의 멸망, 漢민족 국가의 회복에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수록작품 수를 변개한다. 이는 남통에서 교유한 중국인사들이 장건을 비롯하여 공화정을 주창한 사람들이었기에 긍정적이었다가 공화정이 도입되면서 유교가 배격받자, 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 것이다. 즉 김택영은 경쟁의 시대, 적자생존의 시대라는 현실에서 유교가 영향력을 가지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현실문제의 해결은 유교의 회복에 있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經``을 추구한다며 보이는 고답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시의에 맞는 ``權道``를 펼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유교, 즉 유교문화의 회복을 위해 유교사상인 ``도덕``과 한문고문인 ``문장``의 전수를 우선시했고, 이는 김택영이 수행한 출판사업으로 나타난다. 특히 문장가로서 그는 고려 말과 한국(대한제국)의 문장가 아홉 명을 선정한 ``麗韓九家文抄``(후에 김택영이 더해져 『麗韓十家文抄』로 간행)를 통해 역대 한문산문사의 근간을 마련하였으며, 신위의 시집과 박지원의 문집을 선집형태로 간행하여 한문문장의 전범을 보임으로써 ``古典``을 정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매천집』과 『명미당집』 등 동시대 문장대가들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러한 출판사업은 그의 근무지 한묵림인서국에서 기술적인 문제를 뒷받침하고, 아울러 조선 내의 개성, 호남, 영남의 지역 유교지식인들과 남통의 유교지식인들이 연계해 자금조성과 유통을 담당하였기에 가능하였다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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