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처용무의 춤동작과 무용서사 비교 : 일제강점기 1929년 무보(舞譜), (1931) 영상자료를 중심으로

2019 
이 글은 일제강점기에 이왕직아악부의 1929년 무보(舞譜)의 처용무와 1931년 영상자료의 처용무의 춤동작을 비교하고 무용서사의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시대 처용무는 70여년의 단절기간을 거쳐 이왕직아악부의 악사들에 의해 1930년 영친왕 환국공연을 준비하기 위해서 󰡔악학궤범󰡕․󰡔정재무도홀기󰡕 문헌에 따라 복원되었다. 당시의 기록이 국립국악원양성소 출신 이흥구의 책에 1929년 무보로 기록되어 있으며, 1931년 국립영화제작소에 무성영화 이라는 영상자료로 남겨져 있다. 이 일제강점기 처용무의 기록은 2년의 간격을 두고도 서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1929년 무보의 처용무는 문헌보다는 당시에 전해져온 궁중무용 5인무인 연백복지무 등의 대형과 춤동작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31년 영상자료의 처용무는 1929년에 창작된 대형과 춤동작에서 문헌의 내용을 좀 더 보완하여 새로운 춤동작들이 생겨났으며, 이것이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처용무로 전승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처용무는 문헌과 달리 허리를 깊이 숙이는 동작이 많이 발견되며, 이는 조선시대 보다 ‘순응’의 서사가 더욱 심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악사들이 처용무를 왕을 송축하는 궁중무용의 의미로 보았으며, 또는 일제치하에 이왕직아악부의 억눌린 심리가 무의식적으로 춤동작으로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1929년의 처용무는 사방대형의 처용이 중앙을 향해 들어갔다가 돌아나오는 동작이 있어, 현재는 사라진 문헌상의 ‘주선(周旋)’동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동작은 현대인의 삶에서 가치가 하락한 ‘지속’의 서사가 당시에는 중요한 철학적 가치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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