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텍스트로서의 박완서 소설

2017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는 오랜 관행 속에서 정치는 곧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예컨대 박완서가 한국현대사에서 손꼽을 만한 중요한 시기 및 사건을 통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온 몇 안 되는 작가라는 점은 분명한데도, 박완서 문학이 가리키는 것이 ‘한국전쟁’과 ‘산업화․근대화 시기’에 국한되어 있는 형편은 ‘여성’ 박완서의 정치적 태도에 대한 선입견에 의해 ‘그녀’의 문학이 과소평가 돼왔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례일 것이다. 그간 이루어진 한국문학연구의 방법론과 발상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 박완서 소설을 ‘정치적 텍스트’로서 해석/연구해볼 필요와 그 가능성을 타진해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연구가 채택한 주요 방법론 중 하나는 신역사주의(new historicism)의 그것이었는데 이제는 이에 대한 반성도 시작된 터다. 대문자 역사를 부정하는 ‘반-역사’적 문학연구의 풍토가 정착되면서 문학연구가 역사연구의 한 항목으로 왜소화됐고, 그마저도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감이 없지 않으며, 이는 현실과 대화하며 일종의 정치로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자 했던 (인)문학연구의 실천적 의의를 상실하게 했다는 비판을 진지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신역사주의자들이 ‘문학’의 경계를 넘어 문학작품과 인류학적․역사학적 일화(anecdote)들을 동등한 위상의 텍스트로 간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대항-역사’적 가능성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소설의 한 장면이 작가의 실제 경험이나 당대 역사적 사실과 교섭하고 있음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신역사주의적 독해는 소설의 정치성을 추출하는 방법론으로서 그 효용이 적지 않다. 박완서 소설 중 장편 『살아있는 날의 시작』(1980)과 단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1974), 「침묵과 실어」(1980)는 박완서 소설들이 당대의 영향 속에서 생산된 문화의 일부라는 점, 달리 말해 ‘일화의 역장(力場)’에 해당한다는 것을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준다. 『살아있는 날의 시작』(1980)에서 주인공 ‘청희’의 4.19묘지 방문 장면은 작가 자신의 일화에 기대고 있을 가능성이 큰데, 이를 통해 이 소설이 표면상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심층에서 이 멜로드라마를 추동하는 것은 4.19에 대한 그리움, 민주화에 대한 갈망임을 파악할 수 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주인공이 일본인 관광객들과 마주치는 장면은 소설의 발표시기가 1974년이었다는 점에 주의할 때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기생관광’을 통한 일본인 관광객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기생관광에 반대하는 여론이 한일 양국에서 가장 격화됐던 시기가 바로 이 소설이 발표된 73, 74년 무렵이었다. 1980년 12월에 발표된 「침묵과 실어」를 정동이론을 경유해 분석해보면 박완서가 1980년 당시 TV를 포함한 미디어의 존재양식을 ‘달변’의 정치학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변’으로 진실을 ‘침묵’하게 하는 것, 나아가 그 ‘침묵’ 속에 존재하는 ‘언어화되지 않은/언어화될 수 없는’ 저의(底意)를 외면하는 것이 미디어의 속성임을 폭로하면서 당시 신군부의 미디어를 통한 ‘정동의 통치술’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시도한 점을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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