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ew process was proposed to control the defects in the ZMR-SOI thin film. Thermoelectric phenomena were adopted to the conventional lamp-ZMR. The effect of the new process was verified by the experimental examination and analyzed by the computer simulation. It was possible to control the defects by the ZMR with thermoelectric phenomena. The negative direct current density decreased the inter-defect spacing, while the positive current increased the defects spacing. It was shown by the computer simulation that the Peltier effect was the most dominant among the thermoelectric phenomena. The experimental results were correlated with the width of undercooling. A model was proposed to explain the mechanism of defect generation.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일본군의 공세로 초기부터 선조가 피란하고 수도 한성이 점령될 만큼 국가의 존립이 크게 위태로웠다. 그런데 남해안에서는 조선수군의 활약으로 제해권을 장악하여 국가회복의 동력이 되었으니 이 가운데 충청수군의 활동은 육전과 해전을 막론하고 여러 가지로 발현되었다. 그 이유는 지리적으로 수도와 가까워 근왕활동에 임하거나, 수군이었지만 해전을 수행할 군사·전선 등을 온전히 갖추지 못하여 육상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1555년 을묘왜변 이후 실시되었던 제승방략에 의해 충청도 연해지역 11고을이 수군으로 소속됨으로써 임진왜란 당시 충청수군은 11관(읍) 6포(수군진)로 편성되어 있었다. 제승방략에 의한 수군편제는 법제화 된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충청수군까지 지휘하게 되면서 다행히 그의 장계에 정확한 편제가 기록된 것이다. 충청수군의 전반적인 활동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근왕활동이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 전국 단위로 근왕군이 결성되었는데 충청도는 감사 윤선각을 중심으로 근왕군이 편성되었다. 이때 충청수군은 지역방어를 맡고 있다가 8월부터는 주로 강화도를 거점으로 한강유역에서 활약하였으니 의병장 김천일, 전라병사 최원, 의병장 우성전, 경기수사 이빈 등과 함께 연합하여 경성 수복을 목표로 한 양화도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1593년 2월에는 행주성전투를 외원하기도 하였다. 평양성전투 이후 일본군이 한성으로 퇴각하였고 이에 대비하여 한성 주변의 조선군도 전열을 정비하여 행주성을 둘러싼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때 주변 여러 곳에 주둔한 군사들이 외원함으로써 승리하였는데, 충청수군은 수사 정걸의 지휘 하에 전선에 화살을 싣고 수로를 통해 행주성에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용산창을 공격하고 용산 서강으로 나아가 일본군의 세력을 갈라놓기도 하였다. 둘째는 육상활동으로서 2차 진주성전투와 ‘이몽학의 난’ 평정에 참여하였다. 2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한 충청수군은 충청병사 황진을 따라 참전하였는데, 진주성이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전선이 없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육상전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성에서 전사한 충청수군은 고을 수령들로서 태안군수 윤구수, 결성현감 김응건, 남포현감 이예수, 보령현감 이의정 등이었다. 그리고 이몽학의 난 평정 활동은 한산진에 주둔하고 있던 일부 충청수군을 제외하고 충청도 각 본진에 있던 군사들이 참전한 것이다. 즉, 충청수사 최호, 남포현감 박동선, 보령현감 황응성 등이 참전하여 최호가 청난공신 2등에 책훈될 정도로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셋째는 칠천량해전이다. 명일 강화교섭이 성사되지 못하고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려하자 조정에서는 해상방어 대책으로서 우선 충청수사를 한산진으로 내려 보냈다. 우후 원유남, 결성·소근포·마량·서천포·비인·안흥·서천·태안 등 일부 충청수군이 주둔하고 있던 상황에서 수사 최호가 합류하였다. 칠천량해전으로 충청수군은 태안군수 이광영을 제외하고 전멸하였다. 이후 점차 일정한 규모로 충청수군이 회복되어 1598년 순천왜교성전투와 노량해전에 참전하였다. 충청수군이 해상에서 활동한 것은 1594년 3월, 수사를 비롯하여 결성·소근포·마량·서천포·비인·안흥·서천 등 전선 11척이 한산진에 집결하면서부터 1597년 칠천량해전까지이다.
기계 설비에서 발생하는 진동은 고장 및 오작동 방지 등을 위한 상태감시를 위해 상시 계측되며, 주로 압전 소자를 활용한 주요 위치의 진동을 계측하여 분석한다. 최근에는 프레임 카메라를 이용하여 객체 인식 및 영상 신호 처리를 이용하여 대상체의 상태감시를 시도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상용화 및 실적용를 위하여 다양한 신호 처리 기법이 개발되고 있다. 최근, 대상체의 움직임에 중점을 둔 이벤트 기반 비젼 센서(Event-based Vision Sensor)는 대상체의 임의의 위치에서 고주파수 진동 측정에 용이한 이점을 가지고 있기에 이 기술의 개발에 대 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 벤트 기반 비젼 센서를 활용한 기계 설비 진동 계측은 아직까지 영상처리를 통 한 진동 신호 도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영상 자체에 대한 가시화에 대한 연구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영상으로부터 도출 가능한 진동 신호를 가시화하기 위한 모션증폭 기술에 대하여 소개하고, 이벤트 센서를 활용하여 이를 실적용할 방안 및 가능성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향후 이벤트 센서에서 촬영된 영상 기반의 상태 감시 기술에 모션증폭 기술의 접목가능성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수군의 발전은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져 왔다. 고려말 경인왜구(1350) 이후 연해지역 백성들이 내륙으로 이주할 정도로 국가운영의 심각한 위기상황이 초래되었다. 이에 조선 건국 직후부터 해방강화를 위한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이는 수군의 발전으로 백성들이 다시 연해의 옛 고을 및 도서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선 초기 목포진의 설치는 이러한 수군의 발전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운로상의 주요한 포구이자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BR 목포는 나주 목포와 무안 목포가 있었는데, 무안 목포는 나주 목포에서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다로 나아가므로 ‘목포’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목포진은 기존 연구에서는 현재 목포만호성지에 1439년 설치된 것으로 논하고 있으며, 그 이전의 목포진의 위치는 대굴포 혹은 당곶 등 다른 곳으로 추정하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의 관련 내용을 분석해보면 1425년~1432년 사이의 목포 만호진 역시 현재의 무안현 목포(목포만호성지)에 있었다.BR 한편, 목포진과 전라처치사영의 이동과 관계된 주량의 위치는 현재 전라우수영 자리가 아닌 황원 등산진 부근에 있었는데, 이 주량의 지리적 위치는 무안 목포와 기각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목포진이 1432년에 옮겨왔다가 1433년 수군진 명칭을 ‘주량’으로 고침으로써 수군진 ‘목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주량진으로 운영되다가 1438년 진도 남도포로 병선을 옮기고 남도포 만호진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주량진은 사라졌다. 그러다 1439년 다시 무안현 목포에 만호진을 설치함으로써 7년 만에 복설된 셈이었다. 이때 무안현 목포에 수군진 설치의 이유가 목포 주변에 수군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 1432년 전라처치사영을 목포로 옮기기로 결정했던 사안이 실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BR 따라서 전라처치사영의 연혁을 정리하면, 옥구현에 있던 수영을 1408년 경무안현 대굴포로 옮겼으며, 1432년 목포로 이전하기로 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1440년 대굴포에서 현재의 전라우수영지로 옮겼다.
임진왜란 시기 경상좌수군의 수군진이 소재하였던 경상좌도는 일본과 가까운 연고로 가장 먼저 일본군에 침략당하였다. 경상좌수군의 편제는 경상좌수영 및 수군진, 읍수군 등 총 11포 2관의 규모로 조직되어 있었다. 경상좌수군의 지휘체계는 삼도수군통제사의 관하에 있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방어사·도원수 및 도체찰사에 보고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 동래지역이 일본군의 기지가 됨으로써 부산 앞바다를 경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경상좌수군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1593년부터 일부 잔존 수군들이 집결하면서 경상좌수군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중 경상좌수사는 박홍·이유의·이수일·이운룡 등 총 4명으로 파악되는데, 본격적으로 활동한 인물은 이수일과 이운룡이었다.BR 임진왜란 초부터 동래지역이 함락되면서 경상좌수군의 주요 포구가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이수일이 수사에 제수되면서 비교적 북쪽 해안에 있었던 칠포·축산포 등 일부 수군들을 포이포로 집결시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임시 수영을 장기현 포이포로 정한 이후 감포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포이포로 주둔처를 옮겼으며, 다시 염포나 방어진에 주둔하며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일본군의 움직임에 따라 진퇴한 것이며, 육상군과 협공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수영을 이동시킨 것이었다. 경주지역에서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될 때 경상좌수군은 경주 감포로 이동 배치하여 박의장·고언백·홍계남·권응수 등 육상군 및 명군들과 협력하여 경주에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BR 1593년 경상좌수군이 일본군선을 사로잡는 전과를 여러 차례 올리자 조정에서 경상좌수군에 대한 실질적 지원을 추진하여, 주사독전선전관 도원량을 파견하여 전선 9척을 만들어 보냈던 것이다. 수군의 군세가 확장되면서 연일현을 비롯한 동해안의 왜적들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BR 이수일의 후임으로 이운룡이 1596년 2월, 경상좌수사에 제수되었다. 이운룡은 방어선을 남쪽으로 내려 경상좌수영을 울산 염포에 두었다. 이때는 강화교섭이 진행되어 명의 사절단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일본군들의 일부가 일본으로 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강화교섭으로 전쟁이 소강상태였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전력을 보강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팔공산회맹 등 관·의병의 결속력을 강화시켰으며, 산성수축을 진행하였다. 경상좌수군의 전력 강화를 위해 개운포 이북의 격군 및 수졸들을 경상좌수영에 보충하고, 연해 고을에서 전선을 제작하도록 조치하였다.BR 정유재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5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침략하였으며, 울산 서생포를 다시 점거하자 경상좌수군은 염포에서 포이포로 옮겼다. 이후 명나라의 사로병진 작전에 따라 동로군은 1597년 12월, 울산왜성을 공략하였다. 이때 경상좌수군은 명군과 협력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기 위해 울산 동쪽의 방어진(대왕암)에 주둔하였다. 한편, 경상좌수군에 편제된 울산군수 김태허 역시 명군과 연합하여 울산왜성을 공격하였는데, 다만 경상좌수사의 지휘하에 있지 않고 육상에서 줄곧 활동하며 도원수 및 도체찰사의 지휘를 받았다. 1598년 9월, 2차 울산왜성 전투 당시 경상좌수군은 감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육상군과 합세하여 퇴각하는 일본을 추격하여 왜적을 포획하기도 하였다.BR 전란 초기에 붕괴되었던 경상좌수군은 이수일이 경상좌수사로 부임하면서 장기현 포이포에 수영을 설치한 이후, 경주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이운룡은 염포에 수영을 두었다가 포이포, 방어진으로 이동하는 등 전황에 따라 적절히 수영을 옮겨 다니며 활동하였다.